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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故 최규하 전대통령 서교동 자택


  • [월간조선 최초공개] 崔圭夏 前 대통령의 서교동 자택
  • 崔圭夏 대통령은 연탄보일러,
    30년 된 금성 라디오, 50년 된 나쇼날 선풍기,
    하얀 고무신을 남기고 떠났다!
  • 입력 : 2006.12.29 10:00 / 수정 : 2006.12.29 10:38
    • 아침 5시면 일어나 포마이카 床에서 신문을 보며 스크랩을 하는 崔圭夏 前 대통령에게 응접실은 작업실이었다. 스크랩을 마치고 7시가 되면, 비서관들에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전화로 아침 인사를 했다. 왼쪽 선풍기는 장녀 鍾惠씨와 동갑인 1953년산 일제 나쇼날선풍기다. 오른편에는 생산연도를 알 수 없는 석유난로가 놓여 있다.
    • 玄石 崔圭夏(현석 최규하) 前 대통령이 지난 10월22일 서거했다. 기자는 지난 12월7일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崔 前 대통령의 자택을 찾았다. 유족인 차남 崔鍾晳(최종석·56) 하나금융지주 고문이 열쇠로 대문을 열어 주었다. 崔 前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외부인의 출입을 막았다가 이날 처음으로 月刊朝鮮에 문을 열어 준 것이다. 마당에는 목련·감나무, 덩쿨 장미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朴正熙 前 대통령 특보로 일하던 1973년, 종로구 명륜동에서 마포구 서교동으로 이사한 집에는 샘물이 있었다. 이곳에 물펌프를 박아 2004년 작고한 洪基(홍기) 여사가 직접 손빨래를 했다고 한다.

    • ▲ 1979년 12월21일, 10代 대통령 취임식을 마친 후 총리공관으로 돌아와 환담하는 崔대통령 부부.

    • 대지 108평, 건평 97평의 서교동 자택.
    • 광부들과의 약속을 평생 지켜
       

      崔 前 대통령은 1979년 제2차 오일파동 때 만난 장성탄광 광부들에게「나만이라도 끝까지 연탄을 쓰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洪여사는 崔 前 대통령이 장관 시절에나 국무총리 시절에나 가정부를 두지 않고 직접 빨래와 다림질을 하고, 반찬을 만들어 식탁을 차렸다고 한다. 총리 시절, 총무비서관이 『세탁기를 쓰시라』고 권하자 洪여사는 『손빨래도 못 믿는데, 어떻게 기계에 맡기냐』고 했다.
       
        서교동 집에서는 아직도 연탄을 때고 있다.
       
        『연탄을 구하기 어렵다』고 비서관들이 이야기하면 崔 前 대통령은 『연탄, 내가 구해 줄까?』라며 연탄보일러의 불이 꺼지지 않게 했다. 그것은 「광부들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1979년 제2차 오일파동 당시 국무총리였던 崔 前 대통령은 강원도 장성탄광 시찰을 갔다. 막장까지 들어갔던 그는 광부들이 힘들게 연탄을 캐는 모습을 보고 『나만이라도 애정을 가지고 끝까지 연탄을 때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켰다.
       
       
        닳아빠진 흰고무신
       

      외출할 때를 제외하고 崔 前 대통령은 고무신을 즐겨 신었다. 바닥이 닳은 태화고무신과 소박한 슬리퍼가 집주인의 검소함을 말해 준다.

        출입문을 열자 흰고무신과 슬리퍼가 보였다. 崔 前 대통령이 서거하기 전까지 신던 「태화고무」 제품이다. 崔 前 대통령은 뭐든 닳아 없어질 때까지 사용했다. 막 삼우제를 지낸 터라 아직 유족들이 고인의 유품을 챙기지 않았다고 한다. 대지 108평, 건평 97평 규모의 서교동 자택은 1층엔 거실·응접실·안방·건넌방이 있고, 2층엔 崔 前 대통령의 서재와 운동시설, 방이 하나 더 있다.
       
        崔 前 대통령이 거처하던 안방에는 빈소가 차려져 있었다. 응접실엔 脫喪(탈상)을 마치지 않아 아무도 출입하지 않은 상태였다. 崔 前 대통령 生前의 체취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崔孝洵(최효순) 비서관은 『집은 살 만하면 그만이라며 못 고치게 하셔서 거의 손을 못 댔다』면서 『4~5평에 불과한 거실이 손님을 맞기에 너무 비좁아, 퇴임 5년 후 겨우 7~8평으로 늘릴 수 있었다』고 했다.
       

      2005년 8월 말 낙상해 대퇴부 골절을 당하기 전까지 崔 前 대통령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신문 스크랩을 했다. 스크랩을 하다 적을 것이 있으면 달력을 오려 만든 메모지(검정색 다이어리 밑에 있는 것)에 적었다. 검정색 다이어리에는 매일매일의 일정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崔 前 대통령은 한여름을 1953년産 「나쇼날」 선풍기와 부채로 났다. 崔 前 대통령이 『기름만 잘 치면 쓸 만하다』고 말하던 이 선풍기는 장녀 鍾惠(종혜)씨 나이와 같다. 창문에 매달린 구식 에어컨은 장남(胤弘·윤홍)이 미국 근무 시절 쓰던 것을 가져와 설치한 것이다. 에어컨 소리가 너무 커서 손님이 오기 전 켰다가 오면 아예 꺼버렸다고 한다.
       
        崔 前 대통령이 늘 앉던 응접실의 중앙 소파. 그 옆에 놓인 크리넥스 티슈는 대통령이 방금 막 뽑아쓴 듯 사람들의 움직임에 따라 너울거렸다. 다시 그 옆으로 손 지압기, 살담배를 담아 피우는 곰방대 3개가 있었다. 崔 前 대통령은 1992년 담배를 끊었다고 한다. 崔孝洵 비서관은 『담배는 끊으셨지만 손때가 묻은 곰방대를 버리기 아까우셔서 두신 것 같다』고 했다.
       

      崔 前 대통령이 서거하기 전까지 매일 뉴스를 듣던 금성RF-745라디오. 1970년대 초에 생산된 「골동품」이지만 소리는 들을 만했다.

      崔 前 대통령이 응접실 중앙소파에 앉아 쓰던 손지압기. 재떨이에는 곰방대가 3개가 있다. 1992년부터 담배를 끊었지만 손때가 묻은 곰방대는 곁에 두었다. 요즘 찾아보기도 힘든 플라스틱 이쑤시개는 식사 후 늘 사용하던 것이다.

       
        재활용한 플라스틱 이쑤시개
       
        요즘에는 찾아보기 힘든 플라스틱 이쑤시개가 곰방대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崔 前 대통령은 식사 후 이 이쑤시개를 사용하고 나서 정성스럽게 닦아 재활용했다.
       
        응접실 바닥에는 재래시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3만원가량의 돗자리가 깔려 있었다. 추위를 막기 위해 난로와 석유곤로 2대를 사용했다.
       
        서거하기 전까지 매일 뉴스를 듣던 라디오는 골동품 가게에서나 볼 수 있는 「금성RF-745모델」이다. 제조사인 LG전자(前 금성사) 측에 문의해 보니 『1970년대 초에 생산된 것』이라고 했다.
       
        崔 前 대통령은 洪여사의 발병 후 자신의 건강에 더욱 신경을 썼다고 한다. 『내가 건강해야 아내를 잘 돌봐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책장 아래 여백공간은 崔 前 대통령의 「약장」이었다. 혈압약·혈압계·안약·「용각산」·탈지면까지 가지런히 정렬돼 있었다. 대부분 유효기간이 지난 약들이지만 그것마저 버리지 않았다. 가족들이 청소하다 약 위치를 바꿔놓으면 제 위치를 찾아 놓았다고 한다. 한밤중에 약이 필요할 경우를 대비해서였다.

    • 崔 前 대통령은 책장 아래 여백공간을「약장」으로 썼다. 혈압약·혈압계·안약·용각산·탈지면까지 가지런히 정렬돼 있었다. 대부분 유효기간이 지난 약들이다.
    • 의사 지시대로 20년간 다이어트
       

      보일러실의 연탄난로. 이 연탄불로 빨래를 삶고 물을 데워 허드렛물로 썼다. 오른쪽 돌절구는 洪基 여사가 생전에 사용하던 것이다.

        崔 前 대통령은 생전에 허리와 다리가 아픈 요각통을 앓았다. 말년에는 협심증으로 「救心(구심)」을 복용했다. 2005년 8월 말 응접실에서 落傷(낙상)해 우측 대퇴부 골절상을 입었다. 서울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후 한 달 만에 퇴원했는데 거동에 많은 불편을 겪었다고 한다.
       
        대통령 의전비서관을 지낸 申斗淳(신두순) 前 한국가스안전공사 감사는 『각하는 원래 무병 체질』이라고 했다. 협심증으로 약을 복용했지만 당뇨 증상은 없었다고 했다.
       
        1980년 8월 퇴임 직후, 서울대병원에서 종합건강진단을 했다. 朴正熙 前 대통령 주치의를 지낸 閔獻基(민헌기) 서울大 명예교수가 담배를 끊고 다이어트할 것을 권했다. 崔 前 대통령은 閔박사가 짜준 다이어트 식단에 따라 20년간 학생이 선생님의 말을 따르듯 다이어트를 했다.
       
        申斗淳 비서관의 말이다.
       
        『다이어트 식단을 짜준 閔박사도 그 사실을 잊어버렸을 텐데, 각하는 20년간 정석대로 다이어트를 하셨습니다. 영양실조에 걸릴 지경이었죠. 협심증으로 인해 미음 위주의 無鹽食(무염식)을 하다 보니 피부조직이 죽어 갔습니다. 서거 전까지 25kg 이상 몸무게가 줄었으니까요』
       
        대통령 퇴임 직후 어느 날, 崔 前 대통령이 라이터에 담뱃불을 붙이지 못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申斗淳 비서관은 崔 前 대통령을 서울대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尹東浩(윤동호) 안과과장이 『왼쪽눈에 백내장이 왔다』고 했다. 1980년 10월, 美 하버드의대 안과전문 병원인 MEEI의 김철(미국명 조셉 킴) 교수로부터 한국인 최초로 「인공수정체」 이식수술을 받았다. 金교수는 丁一權(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의 통역장교 출신이었다. 그는 崔 前 대통령 수술을 계기로 1982년 訪韓(방한)해 서울대병원에서 백내장 환자 시술 시연을 최초로 했다.
       

      洪基 여사의 가계부. 표지에는 일기장으로 돼 있으나 책장을 넘기면 콩나물 등 부식을 구입한 명세가 적혀있다.

       
        깨알처럼 메모된 洪基 여사 간병일지
       

      2000년 무렵부터 2004년 7월 洪基 여사가 작고하기 전까지 崔 前 대통령은 洪여사가 약 먹는 시간과 양, 한방병원에서 체크한 혈압 변화를 깨알처럼 적었다.

        崔 前 대통령의 아내 사랑은 지극했다. 몸이 불편해지기 전까지는 崔 前 대통령이 직접 洪여사의 약을 챙겨 주고 음식을 먹여 주었다고 한다. 2004년 7월 별세한 洪基 여사가 복용하던 「대원약국」의 조제약이 약장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崔 前 대통령은 메모지에 아내의 간병일지를 썼다. 2000년 무렵부터 작고하기 전까지 약 먹는 시간과 양, 한방병원에서 체크한 洪여사의 혈압 변화를 깨알처럼 적었다. 崔 前 대통령은 洪여사가 작고하기 전까지 가끔 아내 洪여사가 누워 있는 방을 찾아 조용히 손을 잡아 주곤 했다고 한다.
       
        2000년 무렵, 崔 前 대통령은 음성 꽃동네 吳雄鎭(오웅진) 신부가 보내온 산삼 2뿌리를 돌려보냈다. 『꽃동네의 어려운 사람들이 캐 온 산삼을 나 하나 몸보신 하자고 먹을 수 없다』면서 『시장에 내다 팔아 꽃동네 운영에 보태면 내가 먹은 것보다 더 낫다』고 했다.
       
        崔 前 대통령은 매일 신문 스크랩을 빠뜨리지 않았다. 2005년 8월 낙상하기 전까지 아침 5시면 일어나 신문 스크랩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崔 前 대통령은 「포마이카(내열성 합성수지)」 밥상을 놓고 스크랩을 했다. 상 위에 놓인 가위와 문방구에는 먼지가 살짝 쌓여 있었다.
       
        당뇨병 등 건강 관련 칼럼, 강원도 원주 관련 뉴스, 2003년 2월27일자 조선일보 「김대중 前 대통령 조사받으면… 前職 대통령 5명 모두 法 심판대에」란 기사를 오려 「조선일보」라고 적어 놓았다.
       
        盧武鉉 대통령 취임 직전, 축하 메시지가 눈길을 끈다. 崔 前 대통령은 이런 당부를 적었다.
       
        <앞으로의 5년을 내다보면서 몇마디 바라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任期 동안에 너무 많은 일을 하려고 하면, 길지 않은 기간입니다. 그런 만큼 선거기간에 말씀하신 내용 중 실천가능하고 긴요한 國政課題를 優先順位에 따라 중점적으로 시행해 나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둘째, 이번 선거기간 중에 나타난 地域間, 世代間의 의견차이에 대한 和合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國民和合이 이루어지면 전 국민의 지지와 協力 속에 국정과제 목표를 順調롭게 달성하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셋째로 外交安保와 經濟 면에서 국민들에게 安定感을 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국민 각계 각층의 智慧를 모으고 여야 간의 協助 위에 북핵문제를 포함한 외교·안보 및 경제 문제들을 해결하시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대통령께서 國家發展에 큰 공헌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2003. 2.17. 2:30pm>

    • 스크랩에 묻혀 있는 盧武鉉 대통령 축하메시지. 盧武鉉 대통령 취임 직전인 2003년 2월17일 작성한 것이다. 비서관들은 『작성만 하시고 보내지 않았다』고 했다. 2월27일자 조선일보「김대중 전 대통령 조사받으면… 前職 대통령 5명 모두 法 심판대에」란 기사를 스크랩하면서 崔 前 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 申斗淳 前 의전비서관은 『각하께서 12·12 당시 합동수사본부에서 작성한 문서에 서명한 시각이 12월13일 새벽 5시로 알려진 것도 각하께서 항상 문서 하단에 시간을 적어 놓으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崔 前 대통령의 기억력은 대단했다고 측근들은 말한다. 원주보통학교 시절 배웠던 1학년 교과서를 흥얼거리곤 했다고 한다.
       
        『사람 이름은 한 번 들으면 잊지 않으셨고, 측근들의 생일까지 외웠습니다』
       
        崔 前 대통령은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명예회장이었다. 매달 이 단체에서 배달되는 「배달문화」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돋보기 밑에 성경 요한복음 3장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로 시작하는 성경말씀이 영어로 적혀 있다. 유엔개발계획(UNDP) 요원으로 동티모르에 근무 중인 손녀 恩琛(은침)씨가 할아버지에게 적어 드린 것이다.
       
       
        書架에는 외교 관련 책이 많아
       

      2층 한구석에 崔 前 대통령이 사용했던 휠체어가 놓여 있다.

        책장에는 외무차관 시절인 1959년부터 정리한 20여 권에 이르는 앨범이 빼곡히 정리돼 있었다. 오래 전부터 손대지 않아 앨범이 부스러질 것 같았다. 그중 하나를 뽑으려 하자 앨범 커버끼리 달라 붙어 있었다. 崔 前 대통령이 공직생활 동안 받은 서적들을 보면 외교 관련 서적이 주를 이루고 있다.
       
        거실에는 洪여사가 10년 이상 사용하던 그릇장이 있고, 식당은 외교관 시절 사용하던 유리잔으로 그득했다. 나무계단을 올라가니 2층에는 서재와 방이 나왔다. 2층방에서 장남(胤弘·윤홍) 내외가 2년간 거주했다.
       
        2층 한구석에 崔 前 대통령이 사용했던 휠체어가 놓여 있었다. 낙상해 우측 대퇴부를 다치기 전까지는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 헬스사이클에 올라 운동을 했다고 한다. 2층 온도계가 10℃를 가리키고 있었다. 보일러관이 노후돼 난방이 잘 되지 않는 원인도 있지만, 하루 중 시간을 정해 난방을 넣기 때문이라고 했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 자택 맞은편에 조그만 컨테이너 박스가 하나 있다. 비서관과 경호원들의 근무처이다. 차남 鍾晳(종철)씨를 비롯해 崔興洵(최흥순) 비서실장, 申斗淳 前 의전비서관, 崔璿圭(최선규) 강릉최씨 대종회장, 崔孝洵 비서관, 허규치 비서관, 정대성 비서 등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최후를 지킨 비서관들
       
        崔 前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모신 비서관들은 異口同聲(이구동성)으로 『대통령은 겉치레 인삿말을 하지 않았고, 인내력과 끈기가 대단했던 분』이라고 했다. 곁에서 모시는 사람들도 진득하지 않으면 버텨내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申斗淳 前 의전비서관은 崔圭夏 前 대통령이 「국가원수의 격을 갖춘 분」이라고 했다.
       
        『손님을 맞을 때 한 번도 각하께서 다리를 꼬고 계신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中東 순방 때 사우디 국왕과 회담할 때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시고 유창한 영어로 상대방을 설득했습니다』

    • 서교동 자택 마당에서 崔 前 대통령의 비서관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부터 허규치 비서관, 차남 鍾晳씨, 申斗淳 前 의전비서관, 崔孝洵 비서관, 崔璿圭 강릉최씨 대종회장.
    • 1980년 9월1일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제11대 全斗煥(전두환) 대통령 취임식장. 취임식이 끝나갈 무렵 텔레비전 카메라는 崔圭夏 前 대통령 내외를 주시하고 있었다. 式(식)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崔 前 대통령은 총무처에서 마련한 내외귀빈용 안내책자를 집어들어 洪基 여사에게 건넸다. 이때 洪여사가 崔 前 대통령이 들고 있는 봉투를 손으로 쳐버렸다. 어색한 崔 前 대통령은 경호원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12·12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강탈한 全斗煥 대통령의 취임식장에 나타난 洪基 여사가 얼마나 불편했을까 국민들은 동정했다.
       
        申斗淳 의전비서관은 35년간 함께한 崔圭夏 前 대통령을 떠나 보내면서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하늘도 무심치 않은 듯 고인이 영영 가시는 길에 보슬비가 내렸습니다. 지난날의 다정하시고 온유하시면서도 강한 의지를 보여 주셨던 생전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서교동에 영정을 모시고 무거운 발길로 돌아서는데, 그간 참았던 진한 통곡이 치밀어 올라 골목길 전주를 기대어 한바탕 토해 냈습니다. 그런대로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습니다. 생전에 매일 아침 주시던 전화벨 소리가 울리지 않고 조용한 아침을 맞게 되니 더더욱 마음이 허함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