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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시니어

노인보살핌은 비생산적인가?

우리 삶의 과정인 ‘나이 듦’과 죽음

한국 사회가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노인의 임금노동과 정치참여, 소비문화, 건강 등의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나이 듦과 죽음의 이미지는 여전히 삶의 그림자로 남아있다. 삶 속에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불편하다거나, 죽음을 입에 담는 것이 삶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갖게 하므로 살아가는 데 도움이 안 된다고 믿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령화 위기담론 속 노인의 모습

나이 듦과 죽음은 인간이 사고나 재해, 질병, 전쟁 등으로 죽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겪어야 할 하나의 과정이다. 그러나 나이 듦과 죽음은 마치 우리의 삶 속에서 낯선 손님처럼 여겨진다. 노인인구의 증가와, 노인들이 젊은이들의 짐이 되고 있다는 ‘위기 담론’은 노인문제를 저출산 문제와 함께 국가의 주요 과제로 삼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은퇴’라는 제도화된 연령 차별을 문제삼지 않고서, 노인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젊은이들에게 부담이 된다고 생각한다든지, 아동은 미래의 노동력이므로 보살핌의 가치가 있지만 죽음으로 향하는 노인에 대한 보살핌은 비생산적이라는 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자녀를 위해 교육비와 결혼 비용까지 지불하고, 결혼 이후에도 자녀의 취업생활을 위해 가사노동이나 손자녀 양육을 지원하는 등 노년기의 시간배분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서도, 노인이 젊은 세대에게 경제적 부양을 받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부당한 일이다. 노인여성들은 실제 많은 일을 저임금이나 무급으로 하고 있지만, 여전히 ‘의존적인’ 집단으로 간주된다.

자율성과 독립, 생산성, 빠른 속도, 경쟁, 젊음을 강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인은 의존, 느림, 죽음, 추함을 상징하는 존재다. 경험과 지혜가 많은 노인이나, 누워 있는 노인이나, 우리 사회에서는 젊은이에 비해 참신성이나 정보습득 능력이 떨어진다고 간주된다.

‘젊은’ 노인 중심으로 ‘생산적 노인상’ 등장

젊은 노인들이 많아지면서 70대와 90대가 구분되고, 노년기 발달 단계에 따른 과업도 초기노인과 후기노인이 달라야 한다는 이론에 따라 노년기를 ‘죽음을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이라고 보는 의식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젊은’ 노인들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임금노동과 정치참여, 자원활동을 통해 젊은이 못지 않은 능력을 보여주고자 한다. 중산층 노인들은 경험과 고등교육, 경제력 등의 자원을 가지고 ‘생산적 노인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노인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그로 인해 폄하의 대상이 되기보다, 사회에서 제할 일 다함으로써 동등하게 대우 받고 자신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더 이상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불쌍한 사람이거나 소외 받은 자가 아니라, 경제력을 갖춘 소비의 주체이며 시민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인들의 움직임은 노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노년기의 시간을 새롭게 구성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생산적 노인상은 누워 있는 노인이나 치매노인, 가사 노동과 손자녀 양육을 하고 있는 노인여성들의 현실을 설명하기는 역부족이다. 현재 젊은이 못지 않은 노인들도 언젠가 죽어가는 과정에서 누군가를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공적 영역에서의 ‘생산’ 활동만이 인간의 삶에서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보살핌의 문제는 나이 듦과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대부분 사람이 거쳐야 하는 불가피한 보살핌을 ‘의존’이라고 정의하는 현실을 비판하지 않고서는, 노인 문제에 대한 인식 전환이 어려울 것이다. 또 노인전문병원이나 재가서비스 등을 통해 노인보살핌 서비스가 다양화되고 비용이 지원된다 하더라도, 나이 듦과 죽음이 특수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간주된다면 여전히 우리의 삶에서 은폐되고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로 인식될 수 있다.

보살핌의 가치에 대한 새로운 시각

빠른 속도와 독립이 강조되는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의존자라는 낙인을 감수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노인들은 장애와 질병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보살피느라 이중고를 겪거나 가난을 감수해야 하는 여성들의 삶과도 관련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 노인이 된다는 것은 흰머리와 주름살을 가려야 한다는 것을 넘어서, 죽어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몸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식사를 할 수 없고, 옷을 입을 수도 없으며, 목욕이나 대소변을 처리할 수도 없다는 것은 인간적인 존엄성을 상실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더욱이 치매와 같이 이성의 능력 측면에서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일로만 받아들여진다. 누군가를 보살피는 일을 해왔던 노인여성이 정작 자신은 충분히 보살핌을 받으면서 삶을 마무리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요양원이나 납골당이 동네에 들어서면 집값이 떨어지고, 장례식장은 외진 곳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 사별의 슬픔은 오래 드러내선 안 된다는 생각은 죽음이 ‘건강하지 않음’, ‘약함’을 상징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 듦과 죽음을 경험하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자율성을 잃어버려야 하는 현실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자다가 죽는 것, 오래 앓지 않고 죽는 것을 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임종의 고통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과정에서 자율성을 잃는 상태를 끔찍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과연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일까. 우리는 누군가의 보살핌을 통해 성장할 뿐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의식주 측면에서 자급자족할 수 없는 인간은 타자와의 그물망의 관계 속에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자기 몸에 대한 통제력이나 합리적 이성능력에 대해 과도하게 신뢰할수록, 오히려 나이 듦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자아내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인간이 죽어가는 과정에서 죽음 공포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보살핌을 받는다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 보살핌이 삶의 현실이며 과정이라는 인식의 변화가 동반되어야 한다. 보살핌을 받는 사람에 대한 폄하는 삶의 과정을 왜곡하는 것이기도 하고, 여성들이 지금까지 주로 맡아온 보살핌 노동에 대한 평가절하와도 관련이 있다.

많은 사람이 보살핌을 받는 자신을 혐오하면서 죽어간다면, 인간 삶의 덧없음에 대해 한탄하기보다 그 원인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삶의 시작인 출생만큼 삶의 끝인 죽음이 축복 속에 잘 마무리되고 인격적인 성숙의 기회로 삼기 위해, 젊음과 생산의 과잉 뒤에 억압되어 있는 삶의 그림자인 나이 듦과 죽음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 기사는 2007신문발전기금 소외계층 매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일다 이동옥 기자 2007-10-25 19:15:24